とどまるための闘い(ルカ6:37-49)-2019.2.17.顕現第7主日 > 説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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とどまるための闘い(ルカ6:37-49)-2019.2.17.顕現第7主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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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成者 최고관리자 作成日19-02-21 00:36照会1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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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私が子供を育てながら感じていることがあります。
그것은 우리 집 아이들은 정말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それはうちの子供たちは、本当に約束を守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
아이들에게 예배 시간에 떠들거나 장난치지 않으면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子供たちに礼拝の時間に騒いだり、いたずらをしなかったら、プレゼントをあげようと約束をしています。
하지만 매 주 여러분들이 봐서 아시듯이, 떠들고 장난칩니다.
しかし、毎週、皆さんがご覧になっているように、騒いでいたずらをしています。
계약 위반인 것입니다.
契約違反なのです。
그러나 아이들은 자신들이 계약 위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배가 끝나면 선물을 달라고 합니다.
しかし、子供たちは、自分たちが契約違反をし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礼拝が終わったらプレゼントをくれと言ってきます。
그러면 아이가 좋아할만한 것을 선물로 줍니다.
でも、私は契約とは関係なく、子供が好きなものをあげています。
예배 시간뿐만이 아닙니다.
礼拝時間だけではありません。
다른 모든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他のすべてのことも同じです。
아이들은 매번 계약을 위반하고 선물을 요구하고, 부모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있습니다.
子供たちは毎回、約束を違反してもプレゼントを求め、親たちは子供たちにプレゼントを与えています。
그러면서 부모는 아이들에게 기대합니다.
そうしながら、親は子供に期待しています。
다음 번에는 약속을 잘 지킬지도 모르겠다고.
次には約束をよく守ってくれるかもしれないと。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부모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계속 주겠지요.
しかし、約束を守らなくても、親は子供たちにいいものを続けてくれるでしょう。
왜냐하면 서로의 관계가 계약으로 맺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なぜなら、互いの関係が契約に結ばれていないからです。

오늘의 복음서 본문 앞의 구절인 36절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今日の福音書の本文の前の節である36節には、こう書かれています。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あなたがたの父が憐れみ深いように、あなたがたも憐れみ深い者となりなさい」。
이 말씀을 일종의 계약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この言葉を一種の契約として理解している人はいないでしょう。
하나님의 자비를 따라가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神様の憐れみに従っていく人になりなさいという言葉だと思います。
이 말씀 안에는 예수님의 기대가 들어가 있습니다.
この言葉の中には、イエス様の期待が入っています。
사랑이 들어가 있습니다.
愛が入っています。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복음서도 이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だから、今日の福音書もこの言葉と同じ文脈で理解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と思います。
계약이나 율법, 규칙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안 됩니다.
契約や法律、規則の観点から理解してはなりません。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고 계신 것, 우리가 지향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イエス様が、私たちに望んでおられること、私たちが、目指して行くことなのです。

오늘의 복음서 37절을 보겠습니다.
今日の福音書37節をみましょう。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人を裁くな。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裁かれることがない。人を罪人だと決めるな。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罪人だと決められることがない。赦し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赦される。」
비판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裁かれることが好きな人はいないでしょう。
누구나 칭찬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誰もほめられることが好きです。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쉽게 비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しかし、面白いことは、私たちは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簡単に裁い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비판이 필요 없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裁きが必要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必要な時があります。
그러나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의 비판은 대부분 필요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しかし、私たちの日常生活の中での裁きは、ほとんど必要ではないことが多いです。
예수님 시대 때의 율법학자들이 그러했습니다.
イエス様の時代の律法学者たちがそうでした。
그들은 율법의 작은 것 하나까지 비판했고 판단했습니다.
彼らは律法の細かいことまで、裁いて判断しました。
예수님은 그들과의 논쟁에서 늘 비판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イエス様は彼らとの議論の中で、いつも彼らの裁きの問題を指摘なさいました。
율법의 중심인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律法の中心である神の愛を忘れてしまったからです。
그리고 그들이 율법을 내세워 비판한 것에는 자신을 훌륭하게 보이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そして、彼らが律法を立てて裁いたことの中には、自分を偉く見せる意図もありました。
필요한 비판이 아니었다라는 말입니다.
必要な裁きでは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

본문 39절에서 예수님은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本文39節でのイエス様は、「盲人が盲人の道案内をすることができようか。二人とも穴に落ち込みはしないか」と言われます。
여기서 맹인은 비판을 일삼았던 율법학자들을 말합니다.
ここでの盲人は、裁きを立てた律法学者たちを指します。
비판을 통해서 자신을 어필하고 제자들을 모았던 율법학자들은 결국 구덩이, 즉 모순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裁きを通して自分をアピールし、弟子を集めた彼らは、最終的には穴、すなわち、矛盾に落ち込むようになるのです。
그들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까지도 찾아냈습니다.
律法学者は兄弟の目の中にあるおが屑までも見つけました。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무엇이 율법을 위반한 것인지를 찾아내 비판했습니다.
何が間違っているか、何が律法に違反したのかを見つけて裁きました。
그러나 자신들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했습니다.
しかし、自分たちの目の中にある丸太は見えませんでした。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아니라 비판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神様の言葉が中心ではなく、裁きが中心になったからです。
빠져나올 수 없는 구덩이에 빠진 것입니다.
抜け出れない穴に落ち込んだのです。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판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だから、イエス様は弟子たちに人を裁くなと言われました。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私たちも同じではないでしょうか。
자신의 잘못은 잘 보이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은 너무나 잘 보입니다.
自分の過ちはよく見ませんが、他人の過ちは、よく見えます。
그리고 그 잘못을 비판함으로 우리는 자신을 훌륭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そして、その過ちを上手に裁くことによって、自分を偉く見せることもあります。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했을 때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しかし、誰かに自分の過ちを指摘されたら、どんな気持ちになりますか。
기분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気持ちが良くないでしょう。
그래서 비판하기는 쉽고 인내하고 용서하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だから、裁くことは簡単で、忍耐して赦すことは難しいのです。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판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イエス様は弟子たちに裁かないで赦しなさ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
그리고 용서하고, 주는 자에게 충분한 상을 약속하셨습니다.
そして赦して、与える者には、十分な報いを約束なさいました。
38절의 말씀입니다.
38節の御言葉です。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与え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にも与えられる。押し入れ、揺すり入れ、あふれるほどに量りをよくして、ふところに入れてもらえる。あなたがたは自分の量る秤で量り返されるからである。」

우리가 비판하지 않고 용서한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충분한 상을 주실 것입니다.
私たちが裁かず赦したら、イエス様は私たちに十分な報いを与えてくださるでしょう。
하지만 그 약속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이 지나가기 전에 또 한 번의 비판을 할지도 모릅니다.
しかし、その約束にもかかわらず、私たちは今日一日が過ぎる前に、もう一回、裁きをするかもしれません。
그만큼 비판을 하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それほど、裁かないということは、容易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だから、私たちに必要なものがあります。
그것은 일종의 싸움과도 같은 것입니다.
それは一種の闘いとも同じものです。
그러나 상을 받기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しかし、報いを受けるための闘いではありません。
비판을 하지 않으려는 싸움이 아닙니다.
批判をしないようにしている闘いではありません。
하나님의 자비하심 안에 있기 위한 싸움입니다.
神様の憐れみの中にいるための闘いです。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한 싸움입니다.
神様の愛の中にとどまるための闘いです。
싸움의 방향성이 다릅니다.
闘いの方向性が違います。
율법을 성취하고 상을 얻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律法を成し遂げて報いを受けるための闘いではなく、神様の憐れみと愛の中にとどまるための闘いだからです。

우리는 비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私たちは、裁きをしないことができません。
우리는 우리의 눈 속의 들보를 볼 수가 없고 구덩이 속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私たちは、私たちの目の中の丸太を見ることができず、穴の中に落ち込むしかありません。
좋은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맺고 싶지만, 우리의 생각과 환경이 우리를 가시나무와 찔레로 만들어 놓습니다.
良い木になって良い実を結びたいと望みますが、私たちの考えと周りの環境が、私たちを茨と野ばらにしてしまいます。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필요합니다.
ですから、私たちには、神様の憐れみと愛の中にとどまることが必要です。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안에서만이 우리는 우리 눈의 들보를 보고 뺄 수가 있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神の憐れみと愛の中でのみ、私たちは、私たちの目の中の丸太を見て、取り除くことができ、良い実を結ぶことができるからです。
그래서 우리가 하는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だから、私たちがしている闘いは、自分との闘いではありません。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한 싸움입니다.
神様の愛の中にとどまるための闘いです。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비판을 멈추게 하고 정죄하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そして、神様の愛が私たちの裁きを止めさせ、人を判断しないようになさせるのです。

45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45節の御言葉をみましょう。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善い人は良いものを入れた心の倉から良いものを出し、悪い人は悪いものを入れた倉から悪いものを出す。人の口は、心からあふれ出ることを語るのである」。
무엇을 마음 속에 가득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언행이 달라집니다.
何を心の中に持っているかによって、その人の言動が違います。
비판과 정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서 자비를 얻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裁きを持っている人から憐れみを得ることはできないでしょう。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에게서는 용서와 자비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しかし、神様の愛の中にある人からは、赦しと憐れみを得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なぜなら、その人の中には、神様の愛が満ちているからです。
그리고 마음 속에 가득 찬 것은 입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나타내어집니다.
そして心の中に満ちたものは、口だけでなく、行動でも示されています。
창세기의 요셉은 형제들의 질투로 인해 어렸을 적 이집트 상인에게 팔렸습니다.
創世記のヨセフは、兄弟たちの嫉妬によって、幼い頃ミディアン人の商人たちに売られました。
그의 유년 시절은 종이었고, 청년 시절은 감옥 안에 있는 죄수였습니다.
彼の幼時は僕であり、青年時代は監獄の中にいる囚人でした。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늘 함께 하셨고, 요셉 역시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렀습니다.
しかし、神様はヨセフと一緒たおられ、ヨセフも神様の愛の中にとどまりました。
이 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고, 요셉은 이집트의 두 번째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この後、いろいろなことが起こりましたが、ヨセフは、エジプトの第二の権力者になりました。
그리고 요셉은 자신을 판 형제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そして、ヨセフは、自分を売った兄弟たちに出会うことになりました。
전 지역에 기근이 들어서 이집트 외에는 식량이 없었기 때문에 요셉의 형제들도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로 갔기 때문입니다.
全地域に飢饉が始まり、エジプトのほかには穀物がなかったので、ヨセフの兄弟たちも穀物を買うため、エジプトに行ったからです。
형제들을 만난 요셉은 전과는 다른 권력자였습니다.
兄弟たちに出会ったヨセフは、前とは違う権力者でした。
얼마든지 자신의 당한 일들을 돌려 줄 수가 있었습니다.
いくらでも自分が受けたことを返すことができました。
그러나 요셉은 형제들을 용서했습니다.
しかし、ヨセフは兄弟たちを赦しました。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이집트로 불러 전 지역의 기근 속에서도 살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赦すだけでなく、彼らをエジプトに呼び入れて、飢饉の中でも豊かに生き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してくれました。

요셉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ヨセフがこのようにすることができた理由は何でしょうか。
그가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서 일까요?
彼の心が広い人からでしょうか。
저는 요셉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私はヨセフが神様の愛の中にとどまったからだと思います。
요셉이 형제를 용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형제를 용서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ヨセフが兄弟を赦すのではなく、神様の愛が兄弟を赦すことができるようしてくれたのです。
오늘의 복음서 47-48절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今日の福音書47-48節にはこう書かれています。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わたしのもとに来て、わたしの言葉を聞き、それを行う人が皆、どんな人に似ているかを示そう。それは、地面を深く掘り下げ、岩の上に土台を置いて家を建てた人に似ている。洪水になって川の水がその家に押し寄せたが、しっかり建ててあったので、揺り動か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
요셉이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요셉의 반석이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ヨセフが悪を悪に返さずに善いことで返すのは、神様の愛がヨセフの岩になっ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는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神様の愛の中にいる者は、憐れみ深い人になるでしょう。

사랑하는 여러분.
愛する皆さん。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 싸우십시오.
神様の愛の中にとどまるために闘ってください。
내 자신이 무엇인가 이루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 싸우십시오.
ご自分が何かを成し遂げるためではなく、神様の愛の中にとどまるために闘ってください。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비판보다는 용서를 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すべての状況の中で神様の知恵を求め、裁くことよりは、赦す人になってください。
우리의 힘으로는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私たちの力では、憐れみ深い人になることができません。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 안에 있는 우리는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しかし、神様の愛の中にいる私たちは、憐れみ深い人にな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神様の愛が皆さんと共にありますように。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だから、良い実を結んでいる皆さんになりますように祈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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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都大田区池上6-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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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ljwman94@naver.com(イゾンウ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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