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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仰は比べるものではない(ルカ13:1-9)-2019.3.24. 四旬節第3主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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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成者 최고관리자 作成日19-03-31 23:42照会1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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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비교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今の私たちは、比較をする社会で暮らしていると思います。
우리들은 어렸을 적부터 성적과 품행등으로 비교 당하며 커 왔습니다.
私たちは、小さい頃から成績と行いなどによって、ほかの子どもたちと比較されて成長しました。
성장하고 나서는 경제적인 안정, 직업 등으로 비교하고 또 비교 당하고 있습니다.
成長してからは、経済的な安定や職業などで、お互いを比較したり、比較されたりしています。
이러한 비교를 통해서 얻는 것 중 좋은 것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このような比較することを通して、どんな良いものを得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설령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다닌다고 해도, 우리는 또 다른 것을 비교하고 비교에 의한 불만과 불안등을 갖고 있습니다.
たとえ、良い大学を卒業して良い会社に勤めているとしても、私たちは、外の人のことと自分のことを比較し、このことによる不満や不安などを持っています。
한국도 일본도 다른 여러 나라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만, 비교에 민감합니다.
韓国も日本も、他の国々も同じだと思いますが、みんな比較すること、比較されることに敏感です。
1등을 중요시 여기고, 비교해서 우월한 것을 중요시 여깁니다.
1等であることを重要視して、また、比較してほかの人より優れていることを大切に思っています。
이러한 비교가 경제 성장이나 스포츠 선수 육성등 어떤 의미로는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그로 인한 피해도 적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このような比較することが、経済的な成長やスポーツ選手の育成などでは、ある程度、良い影響を与えたことがあるかもしれませんが、それによる被害も、少ないとは言えません。
서로의 비교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お互いを比較することを通して得られるものは、多くないからです。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교는 지금까지 계속되었고 계속 되어 가고 있습니다.
それにもかかわらず、このような比較は、今まで継続され、今後も継続していくでしょう。
그리고 이 비교는 사회 내에서 필요악이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そして、この比較することは、社会の中で必要悪だと思われています。

이러한 사회에서 성장해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쩌면 비교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このような社会で成長して生きている私たちにとっては、比較するということは、自然なことかもしれません。
자연스럽게 비교하고 비교 당하며 우위를 점하려는 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과도 같습니다.
自然に比較し、比較されながら、その中で優位を占めようとすることは、生存のための本能のようです。
그러나 이러한 비교가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しかし、このように比較することが、良いも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は、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특별히 교회,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비교라는 것이 얼마나 당치도 않은 것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特に教会、そしてイエス様の教えによって、私たちは、比較するということが、いかにとんでもないことかが分かります。
하나님의 나라에는 비교가 없습니다.
神様の国には、比較することがありません。
만일 비교가 있다면 수준 미달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もし比較されることがあるとしたら、信仰的な面で落第の人々は、神様の国に入ることができないでしょう。
하나님은 우리를 비교해서 사랑하지 않고, 비교해서 구원하지도 않습니다.
神様は私たちを比較されて愛さ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
比較されて救われることもありません。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비교하며 사는 것을 원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だから、神様も、私たちが比較しながら生きることを望まれないでしょう。

오늘의 복음서의 주된 내용은 회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今日の福音書の主な内容は、悔い改めについて語っています。
회개는 신자의 신앙 생활에서 떼어낼래야 떼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悔い改めは、信者の信仰生活の中で、切っても切れないものです。
회개라는 말이 불러 일으키는 반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입니다.
悔い改めという言葉によって、もたらされる反感がない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それにもかかわらず、悔い改めは私たちにとっては必要なものです。
왜냐하면 우리는 사회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고, 그 사회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이익이나 주장으로 인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なぜなら、私たちは、社会のコミュニティの中で生きていて、その社会のコミュニティの中で、自分の利益や主張をして、そのために、他の人に被害を与えているからです。
그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신앙은 우리가 회개 없이는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없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それだけでなく、私たちの中にある信仰は、私たちが悔い改めなしで、神様のもとへ進むことができないことを教えています。
우리 안에 있는 탐욕과 분노, 질투와 같은 것들로 인해 죄가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私たちの中にある欲と怒り、嫉妬のようなものによって、罪が絶えず生じているからです。
그 죄를 제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마음으로 짓는 죄까지는 우리가 제어할 수 없습니다.
その罪を制御するために、私たちは多くの努力をしていますが、心の中で犯す罪までは、私たちが制御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회개해야 할 것을 공생애의 시작부터 말씀하셨습니다.
だからイエス様は、すべての人が悔い改め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公的な生涯の始めから言われました。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회개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しかし、人々は、このような悔い改めを受け入れませんでした。
회개에 의해 따라오는 여러 불편한 일들이 때문일까요?
悔い改めによって起こるいろいろなことが、気になるためでしょうか。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의식 때문이었을까요?
それとも、神様に選ばれた民族という意識のせいでしょうか。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감췄으며,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서 우월성을 가지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人々は、自分の罪を棚に上げて、外の人々と自分と比較し、優越性をもつという方法を選びました。
다른 이들과 자신을 비교한 것입니다.
他の人と自分のことを比較したのです。
비교에 관한 말씀은 복음서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比較することについての言葉は、福音書のあちこちに書かれています。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라든가 “탕자의 이야기 중 큰 아들의 이야기” 같은 것이 비교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ファリサイ派の人と徴税人の祈りのたとえ」とか「放蕩息子のたとえの中で長男の話」のようなものが、比較することと関連がある言葉です。
그리고 오늘의 복음서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そして今日の福音書も、その一つだと思います。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本文1節をみましょう。
「ちょうどそのとき、何人かの人が来て、ピラトがガリラヤ人の血を彼らのいけにえに混ぜたことをイエスに告げた。」
갈릴리 사람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었다는 말은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 것일까요?
ガリラヤ人の血を彼らのいけにえに混ぜたという言葉は、どんな意味を表わすのでしょうか。
피를 제물에 섞었다는 말은 여러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만, 결론적으로는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라는 말입니다.
血をいけにえに混ぜたという言葉は、様々な意味に解釈することができますが、結論的には、ガリラヤ人たちがピラトによって殺されたという言葉です。
그리고 그 죽음에는 로마를 대표하는 빌라도와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전이 있습니다.
そして、その死の中には、ローマを代表するピラトとユダヤ人たちが大事に思っている神殿があります。
이 두어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러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何人かの人がイエス様のもとに来て、このような話をした理由には、いろいろな理由があるでしょう。
예를 들면 갈릴리에서 활동하는 예수님에게 갈릴리 사람의 이야기를 해서 정치적인 발언을 이끌어 내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例えば、ガリラヤで活動しているイエス様にガリラヤ人の話をして、政治的な発言を引き出そうと思った可能性があります。
아니면 그들이 갈릴리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 예루살렘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または、彼らがガリラヤ人のことが好きではないエルサレムの人だった可能性もあります。
또는 그들이 죽임을 당한 것이 그들의 죄의 값이라고 둘러 말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または、彼らが殺されたのは、彼らの罪の代価だと言い繕った可能性もあります。
이들의 고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예수님의 답변으로 봐서는 그들은 비교를 했던 것 같습니다.
彼らが告げたことには、いろいろな理由があると思いますが、イエス様のお答えを読むと、彼らの自分のことと比較をしていたようです。
2절의 말씀입니다.
2節の御言葉です。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イエスはお答えになった。『そのガリラヤ人たちがそのような災難に遭ったのは、ほかのどのガリラヤ人よりも罪深い者だったからだと思うのか。』」

그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당한 일들이 죄의 값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彼らは、ガリラヤ人たちがされたことが、罪の代価だと思っていたようです。
그리고 이러한 생각 안에는 자신들은 그들보다 나으니 그런 재난을 당하지 않았다라는 우월성, 즉 비교에서 오는 우월성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そして、このような考えの中には、自分たちは、彼らよりも善い人だから、そんな災難に遭わなかったという優越性、すなわち、比較することから来る優越性があったと思います。
예수께서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그 사건은 죄의 결과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イエス様はこのような考え方を持っている彼らに、その事件は、罪の結果ではないことを言われます。
그리고 그러한 비교를 통해 안심을 얻는 그들에게 모든 사람이 회개해야 함을 말씀해 주십니다.
そして、そのような比較することを通して、安心を受けたかった彼らに、すべての人が悔い改め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教えてくださいます。
3절의 말씀입니다.
3節の御言葉です。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決してそうではない。言っておくが、あなたがたも悔い改めなければ、皆同じように滅びる。」
신앙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서 안심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信仰は、他の人と自分を比較して、安心を得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
특히 다른 사람의 재난이나 불행을 자신의 신앙적인 우월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特に、他の人の災難や不幸などを自分の信仰的な優越を示すための手段として使ってはいけないのです。
비교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比較する理由は何でしょうか。
비교를 통해서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比較することを通して、自分に免罪符を与えようとす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그렇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イエス様はこのような考えを持っている彼らに、そうではないと言われます。
신앙이란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信仰とは比較す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
오히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자신의 일처럼 슬퍼하는 것이 신앙이지 않겠습니까!
むしろ災害を受けた人々を慰め、自分のことのように思うことが、信仰ではないでしょうか。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한 가지의 사건을 더 말씀해 주십니다.
イエス様は彼らに、もう一つの事件のことをおっしゃいます。
4절의 말씀입니다.
4節の御言葉です。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また、シロアムの塔が倒れて死んだあの十八人は、エルサレムに住んでいたほかのどの人々よりも、罪深い者だったと思うのか。」
아마도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たぶん人々は、エルサレムで起こった事件も、そのように思っていたようです。
하지만 이러한 재난은 죄의 결과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이 아닙니다.
しかし、このような災難は、罪の結果による神様の裁きではありません。
재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의 신앙적인 우월을 나타내는 것도 아닙니다.
災難にあわない人の信仰的な優越性を表わすことでもありません。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だから、自分に良くないことが起こっていないとしても、自分は彼らよりましだと思ってはならないのです。
회개가 필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悔い改めが要らない人はいません。
우리 모두는 죄인이고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私たちは、みんな罪人であり、神様のお許しが必要な人々です。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라는 말이 여러분들의 귀를 거슬리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それにもかかわらず、悔い改めという言葉が、皆さんには耳障りかもしれません。
그러나 반대로 회개라는 것이 주는 의미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しかし、逆に、悔い改めが与える意味を一度考えてみてください。
회개에는 자기 반성이 있습니다.
悔い改めの中には、自省があります。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뒤따라옵니다.
神様の赦しと愛が付いてきます。
회개라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불편한 것 일수도 있지만, 회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悔い改めるとは、私たちにとっては、気になることかもしれませんが、悔い改めを通して、私たちは神様のもとに進むことができます。
그리고 회개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모두가 같은 사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そして悔い改めを通して、私たちはみんな同じ状況になっているということが分かります。
타인과 비교를 하고 자신의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죄를 드러내고 회개하는 것이 서로가 비교를 하지 않는 방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他人と比較をして、自分の罪を隠すのではなく、むしろ自分の罪を表わして、悔い改めることが、お互いが比較をしない方法になるかもしれません。

6-9절까지는 비교에 대한 우리 신앙인들의 자세에 대해 말해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6節から9節までは、比較することについて、私たちの信仰の姿勢を教えてくれる言葉だと思います。
예수께서는 비유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イエス様はたとえを通して、実を結ばないいちじくの木について言われます。
심은 지 3년이 되도록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 나무를 본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무화과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植えてから3年になっても、実を結ばなかったイチジクの木を見た主人は、園丁にイチジクの木を切り倒せと言います。
보통 3년간 열매 맺지 못했다면 앞으로도 열매를 맺지 못할 가능성이 높겠지요.
普通3年間、実を結ばなかった木の場合は、後でも実を結ぶ可能性は少ないでしょう。
그러나 포도원지기는 1년의 기회를 더 달라고 합니다.
しかし、園丁は1年の時間を要求します。
8-9절의 말씀입니다.
8-9節の御言葉です。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園丁は答えた。『御主人樣、今年もこのままにしておいてください。木の周りを掘って、肥やしをやってみます。そうすれば、来年は実がなるかもしれません。もしそれでもだめなら、切り倒してください。』」

만일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다른 나무와 비교하는 것만으로 처리했다면, 이 무화과 나무는 잘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もし、実のならない木のことを、外の木と比較することだけで、考えるなら、このイチジク木は切られることが当然です。
그러나 포도원지기는 이 나무를 다른 나무와 비교하지 않습니다.
しかし、園丁は、この木を他の木と比べませんでした。
오히려 이 나무를 위해 힘쓰겠다고 말합니다.
むしろこの木のために、力をつくすと言います。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하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これが私たちの信者が持たなければならない姿勢だと思います。
모두가 비교하고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게 여기지만, 우리는 비교를 멈춰야 합니다.
みんなが比較して、自分のことをほかの人より優越だと思っていますが、私たちは比較することを捨てなければなりません。
그리고 포도원지기처럼 비교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것들을 주어야 합니다.
そして、園丁のように、比較される人々のために、力を尽く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

사랑하는 여러분.
愛する皆さん。
신앙은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信仰は比べ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자신의 우월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비교를 통해 안심을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自分のことがましだということを示すことでもなく、比較することを通して安心することでもありません。
신앙은 자신의 것이며, 그 신앙을 위해 회개도 필요한 것입니다.
信仰は、自分のものであり、その信仰のために悔い改めも必要なことです。
하나님은 우리를 비교해서 사랑하지 않습니다.
神様は私たちを比較して愛しておられません。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私たちのことをそのまま愛しておられます。
이것을 기억하고 우리도 비교를 멈추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このことを覚え、私たちも比較することを捨てて、お互いを愛する人々になりましょう。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神様の愛が皆さんと共にありますように祈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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