見えない人、見ない人(ヨハネによる福音書9:13-34)-2020.3.22. 四旬節第4主日 > 説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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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えない人、見ない人(ヨハネによる福音書9:13-34)-2020.3.22. 四旬節第4主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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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成者 최고관리자 作成日20-04-07 23:19照会4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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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화제에 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最近、韓国の社会では、話題になったことが一つあります。
그것은 교회의 대표적인 모임인 주일 예배입니다.
それは、教会の代表的な集まりである主日礼拝です。
전염성이 강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나 지자체등에서는 가급적 모임을 중지하기를 권유하고 있습니다.
伝染力が強いコロナウイルスが流行っているので、政府や自治体などでは、なるべく集まりを停止することを勧めています。
종교적인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宗教的な集まりも同じでしょう。
그러나 일부 교회에서는 이 권유를 따르지 않고 있었습니다.
しかし、一部の教会では、この勧告に従っていませんでした。
왜냐하면 한국 교회(보수) 내에서는 “주일성수”, “일요일은 예배 드리는 날”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なぜなら、韓国教会(保守派)の内では、「主日聖守」、「日曜日は礼拝を守る日」という考え方を持っているからです。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로 인해 교회 내에서 바이러스에 전염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しかし、残念ながら、これによって、教会でウイルスに感染されることが起こりました。
이 일은 뉴스를 통해 보도가 되었고 이러한 일이 일어나자 여러 교회들은 서둘러 모임을 중지했습니다.
このことは、ニュースを通して報道され、このようなことが起こると、教会は急いで集会を停止しました。
물론 중지 하지 않는 교회도 있습니다.
もちろん停止していない教会もあります。
그리고 신자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예배하러 모이는 것과 모이지 않는 것, 어느 것이 신앙적인 것인가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そして信者たちの間では、このような状況で礼拝に集まることと集まらないこと、どちらが信仰的なことかという話が出始めました。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皆さんはどう思われますか。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私はよく分かりません。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모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러한 상황이 몇 개월간 지속된다면 모이지 않는 것이 좋다고만은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今のような状況では、集まらない方がいいと思いますが、このような状況が何ヶ月間続くと、集まらない方がいいとは言えないでしょう。
그래서 저는 이러한 상황에서의 주일 예배를 지키는 것에 대한 유무를 신앙 또는 신앙을 재는 척도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それで、私はこのような状況での主日礼拝を守ることについての有無を、信仰や信仰を測る尺度として考えてはならないと思います。
그리고 단순히 주일 예배를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가 아닌 주일 예배라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そして、単純に主日礼拝を守るか守らないかではなく、主日礼拝というものが私たちにどのような意味を与えるかを知るべきだと思います。
오늘의 복음서는 현재 우리의 상황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今日の福音書は、現在の私たちの状況に合うと思います。
바이러스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놓고 바리새인들은 신앙의 유무를 판단합니다.
ウイルスに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が、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律法に基づいて、安息日を守ることを第一に考え、信仰の有無を判断します。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안식일의 율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생각입니다.
いくら善いことをするとしても、安息日の律法を破ってはならないというのが、ファリサイ派の人々の考え方です。
이러한 생각은 과연 옳은 것일까요?
このような考え方は果たして正しいことでしょうか。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어떤 선한 일보다 훌륭한 일일까요?
律法によって、安息日を守ることが、どんなことより良いことでしょうか。

안식일은 히브리어 사바트에서 유래합니다.
安息日はヘブライ語サバトという単語に由来します。
이 말은 본래 ‘휴식하다, 축제하다’라는 뜻입니다.
この言葉は本来、「休む、祝祭をする」という意味です。
다시 말해 안식일에는 ‘일상의 노동 후에 쉼(축제)을 얻는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つまり、安息日には「日常生活の労働の後に休み(祝祭)をいただく」という意味が含まれています。
루터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 날을 주신 첫 번째 이유를 “육체의 필요 때문”이라고 합니다.
ルターは、神様が人にこの日を与えてくださった最初の理由は「肉体の休みのため」と言いました。
그리고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そして、また別の理由もあります。
그것은 그 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라는 것입니다.
それは、その日、私たちがささげる礼拝を通して、神様が私たちのために働いてくださるということです。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과 성만찬이라는 은혜를 주십니다.
神様は礼拝を通して、私たちに御言葉と聖餐という恵みを与えてくださいます。
그리고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하여 찬송과 기도를 드립니다.
そして、私たちはその御恵みに感謝し、賛美と祈りをささげます。
이것이 우리에게 안식일(주일)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これが私たちに安息日(主日)を与えてくださる神様のご意志です。
즉 안식일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사람의 쉼과 하나님의 일하심(은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すなわち、安息日というのは、徹底的に「人の休みと神のお働き(恵み)」に重点があります。
그래서 안식일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쉬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에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それで、安息日は律法を守ることに意味があるのではなく、神様の御手のうちに休んで、恵みを享受することにその意味があるのです。
안식일도 물론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安息日ももちろん、人が神様からいただくものであるからです。
그러나 오늘의 복음서에서의 유대인들은 그 날을 지키기 위해 “사람의 쉼”도 “하나님의 일하심”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しかし、今日の福音書でのユダヤ人たちは、安息日の律法を守るために、「人の休み」も「神のお働き」も全部失ってしまいました。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안식일에 사람을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神であるイエス様は、安息日に人のためにお働きになりました。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これは当たり前のことです。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안식일에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人に恵みを与えてくださるためにイエス様は安息日に盲人の目を開かせました。
그리고 그 맹인은 참 사바트를 얻었습니다.
そして、その盲人は真のサバトを得ることができました。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그에게 축제할 일이 생긴 것입니다.
生まれつき目が見えなかった彼にお祝いするべきことが起こったのです。
그런데 이 일은 모두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 되지 못했습니다.
ところが、このことは、皆に喜びを与えることにはならなかったのです。
특히 율법을 지키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는 이 일이 분쟁하게 되는 일이 되었습니다.
特に律法を守っている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このことで意見が分かれることになりました。
16절의 말씀입니다.
16節の御言葉です。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ファリサイ派の人々の中には、『その人は、安息日を守らないから、神のもとから来た者ではない」と言う者もいれば、「どうして罪のある人間が、こんなしるしを行う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と言う者もいた。こうして、彼らの間で意見が分かれた』。

그들이 분쟁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彼らの意見が分かれた理由は何でしょうか。
과연 율법 때문일까요?
果たして律法のためでしょうか。
표면상의 이유는 율법 때문이었겠지요.
表面上の理由は、律法のためだったでしょう。
그러나 그들의 깊은 마음 속에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미움이 있었습니다.
しかし、彼らの深い心の中には、律法ではなく、イエス様についての憎しみがあったと思います。
하나님의 법을 지켰는가 아닌가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神様の律法を守ったかどうかについてのことではなかったのです。
예수님을 법을 어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표면상으로 내세웠습니다.
イエス様を犯罪者にするために、彼らは神様の律法を表面上に掲げました。

하나님의 법, 즉 성경의 말씀은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지요.
神様の律法、すなわち聖書の言葉は、人を裁くためのものではないでしょう。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しかし、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神様の御言葉を裁きの道具として使いました。
미움이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킨 것입니다.
憎しみが神様の御言葉を変質させたのです。
그리고 이러한 일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そして、このようなことはこれだけでは終わりません。
미움에 사로잡힌 바리새인들은 맹인을 추궁하기 시작합니다.
憎しみにとらわれた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盲人であった人を追及し始めます。
몇 번이나 맹인을 추궁했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합니다.
何度も彼を追及しましたが、自分たちが望む答えを引き出すことができません。
그러자 그들은 맹인이 아닌 맹인의 부모를 불러냅니다.
すると彼らは盲人であった人だけではなく、彼の両親を呼び出しました。
18-19절의 말씀입니다.
18-19節の御言葉です。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それでも、ユダヤ人たちはこの人について、盲人であったのに目が見え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ことを信じなかった。ついに、目が見えるようになった人の両親を呼び出して尋ねた。『この者はあなたたちの息子で、生まれつき目が見えなかったと言うのか。それが、どうして今は目が見えるのか』」。

태어나면서부터 보지 못했던 자가 보게 된 것은 그 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 부모에게도 큰 기쁨일 것입니다.
生まれつき目が見えなかった人が見えるようになったのは、その当の人だけでなく、その両親にも大きな喜びだったでしょう。
이것이야말로 안식일의 참 의미인 “축제”를 해야 할 일입니다.
これこそ安息日の真の意味である「祭り」を行わ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です。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그 미움은 “축제”를 방해합니다.
しかし、ファリサイ派の人々が持っていたその憎しみは「祝祭」を妨げます。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부정했고 이웃의 축제를 방해했습니다.
神様のお働きを認めなかった上、隣人の祝祭を妨げました。
그 안식일은 부모에게 있어서 아들이 눈을 떴다는 기쁨보다 출교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큰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その安息日は、両親にとって、息子が目を開いたという喜びよりも、追放されるかもしれないという恐れが大きい安息日になりました。
예수님의 기적을 본 이웃 사람들도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습니다.
イエス様の奇跡を見た近所の人たちも口を閉じるしかありませんでした。
유대인 자신들조차도 참 의미로서의 안식일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自分たちさえも、真の意味での安息日を守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
두려움이 본 것을 말하지 못하게 했고 미움이 마음의 눈을 가렸습니다.
恐れが見たことを言えないように口を塞ぎ、憎しみが心の目を覆いました。
그리고 그들 모두는 스스로가 맹인이 되었습니다.
そして、彼らは皆自らが盲人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
두려움 앞에 눈을 감았고, 미움이 눈을 가린 것입니다.
恐れの前に目が閉じられ、憎しみが目を覆ったのです。
사람을 위한 안식일이, 사람에 의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습니다.
人のための安息日が、人によってめちゃくちゃにされてしまいました。

그러나 단 한 사람!! 모두가 눈을 감고 있었을 때 맹인이었던 사람만은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しかし、一人!皆が目を閉じていたとき、盲目であった人だけは目を開けていました。
예수께서 그의 육신의 눈을 뜨게 해 주셨을 때, 그의 마음의 눈도 함께 떠졌던 것입니다.
イエス様が彼の肉体の目を開けられたとき、彼の心の目も一緒に開いたのでしょうか。
그러나 눈을 뜬 그에게 찾아온 것은 축하와 축제가 아니라 냉혹한 현실이었습니다.
しかし、目を開けた彼に来たことはお祝いや祝祭ではなく、厳しい現実でした。
축하를 받아야 할 그는 협박과 추궁을 당했습니다.
お祝いを受けねばならない彼は脅迫され、追及をされました。
하지만 그가 다른 사람과 달랐던 것은 다시 눈을 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しかし、彼が他の人々と違ったのは、再び目を閉じなかったというのです。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彼はこのように言います。
27절의 말씀입니다.
27節の言葉です。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もうお話ししたのに、聞いてくださいませんでした。なぜまた、聞こうとなさるのですか。あなたがたもあの方の弟子になりたいのですか」。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すると、ファリサイ派の人々がしたことは何でしたか。
34절의 말씀입니다.
34節の言葉です。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彼らは、『お前は全く罪の中に生まれたのに、我々に教えようというのか』と言い返し、彼を外に追い出した。」
맹인이었던 자가 자신들을 따르지 않자 그를 죄 가운데서 난 자라고 저주합니다.
盲人であった人が自分たちに従わないと、彼を罪の中に生まれたものだと呪います。
그리고 결국은 쫓아내어 버립니다.
そして結局は追い出してしまします。
모든 것을 봤지만 못 본 척 한 것입니다.
すべてのことを見ましたが、見逃したのです。
봤지만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見ましたが、見えなかったのです。

사랑하는 여러분.
愛する皆さん。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安息日は人のためにあるものです。
이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부터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これは、律法が私たちに与えられる前からあったものでした。
주일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主日もこれと同じだと思います。
주일은 우리가 주 안에서 쉬는 날, 부활의 축제를 맛보는 날이지 예배를 지키는 날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主日は、私たちが主にあって休む日、復活の祭りを味わう日です。
礼拝を守る日ではないと思います。
그래서 주일은 지킨다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だから主日は、守るという言葉と合わないと思います。
주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해 주시는 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날입니다.
主日は、神様が私たちのために働いてくださる日、御恵みを与えてくださる日です。
그렇기 때문에 이 날의 모임에 대한 강제나 금지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だから、この日の集まりについての強制や禁止があってはならないと思います。
우리 모두가 자유롭게 모이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私たちみんなが自由に集まる日だからです。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すべての状況の中で、神様の恵みがありますように。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고통 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コロナウイルスによって苦しんでいる人々に神様の癒しがありますように、主の御名によって祈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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